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전성현 (동아대학교)
저널정보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족문화 한국민족문화 제49호
발행연도
2013.11
수록면
271 - 316 (46page)
DOI
10.15299/jk.2013.11.49.27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식민자’ 또는 ‘풀뿌리 식민자’로 평가되는 재조일본인 오이케 츄스케는 1856년 쓰시마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인 1875년 부산으로 건너와 대일무역에 종사하면서 친형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무역 및 고리대업은 물론이고 일제의 조선 침탈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며 조선의 출입구인 부산과 오이케여관을 통해 일본군부와 관계를 맺고 토지구매, 군수물자조달을 통해 자본을 확장했다. 개인사업과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오이케는 강고한 인적네트워크도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기반과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확대해 나갔다. 그가 맺은 인적네트워크는 제국주의 일본의 핵심적인 인사인 관료와 군인은 물론, 일본 본국의 재벌 및 경제인, 그리고 조선 또는 부산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 등이었다.
부산에서 쌓은 인적·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오이케는 경제활동과 공직활동을 통해 ‘부산의 오이케’에서 ‘조선의 오이케’로 나아갔다. 우선 그는 개인경영의 11개 부문을 토대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동시에 부산 및 조선의 각종 회사와 조합의 설립과 경영에 뛰어들어 1929년 사망 때까지 부산 및 조선재계의 원로로서 활동하였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공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업회의소, 부협의회(도평의회), 학교조합 3단체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면서 향리인 쓰시마에 입후보하여 당당히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이케는 ‘부산의 오이케’를 넘어 ‘조선의 오이케’로 표상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공한 식민자로 위치 지워졌다. 하지만 식민지에서의 성장과 제국주의 내의 위상은 식민지 조선이라고 하는 공간, 특히 부산이라는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여기서 본국 일본인과 식민지 일본인 간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그 독특한 위치도 드러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부산 정착과 ‘지역’을 통한 인적망의 형성 - ‘釜山의 大池’
3. 기업 활동과 ‘식민자’로서의 위상 - ‘朝鮮의 大池’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4)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4-900-003524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