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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金晧東 (영남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22호
발행연도
2011.8
수록면
293 - 330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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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분열에서 통일을 이룬 역사적 사건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의 후삼국통일이다.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중국대륙이 대분열의 시기였기 때문에 외세의 개입이 거의 없었던데 반해 신라의 삼국통일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고구려의 정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외세의 개입이 뚜렷하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시기를 살았던 단재 신채호가 김유신을 김춘추와 함께 당이란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한 이래 김유신에 대한 긍정적 평가 못지않게 부정적 시각이 혼재되어 있다. 또 김유신의 출자가 금관가야계 출신이라는 관점에서 신분적 하자를 논하기도 하는가 하면 김유신의 경우 신라왕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점을 내세워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본고는 종래의 김유신에 대한 연구 시각과는 달리 김유신이 사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어떻게 顯彰, 追崇되었는가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신라시대의 경우, 김유신에 대한 최대의 예우가 가해지면서 흥무대왕으로 봉해지기도 하였다. 김유신의 흥무대왕 추봉 그 자체는 국가적 추숭의 한 예이지만 신라 하대 진골귀족의 분립성이 강하게 대두되는 현실에서 국가적 추숭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김유신의 현창을 통한 신김씨 일족의 결집을 강화시키는 기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장청의 《金庾信行錄》의 저술 역시 그런 의미를 작고 있다. 그렇지만 국가적 규모의 사당의 건립을 통한 추숭 보다는 김유신과 인연 있는 곳, 그리고 김유신의 후손들이 뿌리내린 곳인 진천, 강릉, 효령지역에서의 ‘金庾信神祠’에서 지역단위의 제사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말려초 지방세력의 대두, 후삼국에 따른 지방행정체계의 성립, 성씨의 보급 과정에서 나말려초의 호족들이 성황신으로 떠받들여졌다. 그렇지만 고려시대 이후 각 지역에서 떠받들여지는 ‘성황신’과는 달리 ‘金庾信神祠’의 경우 김유신과 그의 어머니인 만명이 떠받들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다가 조선중기이후 주자성리학이 뿌리박히게 되면서 만명이 구축되고 향사대상이 되는 인물을 배출한 문중으로 儀禮 移管 등이 일어나는 등 유교적 사당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통일신라시대의 김유신에 관한 顯彰과 追崇
Ⅲ. 고려시대의 김유신에 대한 추숭
Ⅳ. 조선시대의 김유신에 대한 추숭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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