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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양철학연구회 동양철학연구 동양철학연구 제63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29 - 160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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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국가 고려에서 유교국가 조선으로 바뀌는 데에는 과거에서 볼 수 없었던 종교의식을 비롯한 생활문화 전반에 큰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 가운데서 주목되는 큰 인물이 이방원이다. 그는 부친 이성계를 배경으로 고려 혁명의 중추적 역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정계의 실세가 되어 곧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으로 등장한다. 그는 시대적 과제인 유교국가 건설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여기에는 숭유억불의 맥락을 유지해야 할 과제가 포함됐었다. 실제로 그의 내심에는 불교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구조가 부단히 지향됨으로써 그 역사적 과제를 원만히 해결해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불교를 말할 때는 ‘崇佛’과 ‘斥佛’의 상반된 두 단어가 사용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태종 자체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태종조 전체의 불교를 설명함에 있어서 필자의 관점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로 정리된다. 태종은 증험과 효과를 중시하는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교에 대해서는 일탈의식, 즉 ‘탈불교의식’을 보이게 되었다. 그는 생사 초월의 사상계에 대해서는 고원하다며 유보하는 입장을 취할지언정 어떠한 崇信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思考는 무인으로서의 인생 경험과 현세 중시의 유학 공부 및 여러 위인의 열전 확인 등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항상 불교에 대하여 ‘허탄함’ ‘혹세무민’ 등의 부정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어떤 불사를 일으킬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본의와 다른 것’이라 하며 일정한 간극을 유지시켰다. 그리하여 자신과 직결된 불사는 엄정히 거부하였으니 그 최종적인 모습은 僧舍 不備의 墓制論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태종 자체의 관점에서는 ‘숭불’이나 ‘호불’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은 것이다. 태종은 부인의 치병⋅연명을 위한 정근기도에 참석하면서도 그 효과의 여부를 놓고 승려들을 겁박하여 내면의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정근기도가 비록 불교행사이지만 그에 참여하는 순간은 생명과 효애의 가치가 제일이다. 따라서 어떤 사상이나 신념이 개입될 수 없다. 그러므로 儒臣들도 그러한 불사에 대해서는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유신들의 척불론에서는 흔히 승려들의 부패와 군신⋅부자 관계 일탈의 비윤리성이 강조된다. 태종은 이를 주목하면서도 불교의 종지는 ‘慈悲’에 있다고 말하여 윤리적 긍정성을 확인한다. 나아가 그는 ‘승도들도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라는 발언으로 유교 애민정신을 넓혀갔다. 국가적으로 유교 예제를 확대시키는 가운데 때때로 불교의식도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일말에 흐르는 그의 유불공유의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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